딸까닥 소리
엊그제 수요예배에 맞추어 차 운행을 하는 중에 일어난 ‘딸까닥 소리’ 사건(?)은 근 10년 어간에 저를 가장 많이 웃게 한 일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 사건으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입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봉고차가 교회마당에 도착하여 모두들 내릴 때, 맨 뒤에 내리시는 한 할머니 성도 한 분이 내리시지는 않고 차 중에 있는 손잡이를 한 손으로 붙잡고 우두커니 서 계셨습니다. 이를 보고 먼저 내리신 남편 성도 분이 냅다 소리를 칩니다.
“아- 빨랑빨랑 내리지 않고 뭘 꾸물대고 있어-!!”
할머니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선 채로 대답합니다.
“가만있어 봐요, 다리에서 딸까닥 소리가 나야 돼...”
그래서 모두들 한 바탕 웃었는데 예배 후 오후 내내 그 이야기로 작은 교회가 웃음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짓궂은 나이 드신 집사님들이 놀려댑니다.
“아, 그 다리는 딸까닥 소리가 나야 시동이 걸리는 다리여?”
사건직후, 20분 뒤에 강단에 올라야 하는 저는 이 일이 강단 위에서 생각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너무도 우스워서 설교와 예배에 지장을 줄 것 같아서 입니다. 다행히 예배 집례 중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고 무사히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리고는 점심 애찬을 나누면서 다시 이 이야기로 웃음꽃이 활짝 폈습니다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하여 보니 나이 드신 ‘할머니 무릎의 딸까닥 소리’는 단순히 웃을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하하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 딸까닥 소리는 앉거나 일어설 때에 가끔 팔 다리에서 근육이 제 자리를 찾는 ‘우두둑’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어떤 집사님의 말처럼 나이가 많아지고 몸에 기름기가 빠지니까 ‘우두둑’하는 기름진 소리가 아니라 ‘딸까닥’하는 메마른 소리가 나는 것일까요?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이 흔히 하는 말씀 중에 “이제는 몸에 기름기가 다 빠졌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슴도 푹 꺼지고 팔다리가 앙상하여져서 몸에서 삐거덕 소리가 나고 또 그래서 힘이 없어서 일하지 못하고 조금 넘어지기만 하여도 크게 다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그 늙어감의 우울함을 말하는 불가항의 푸념적 탄식 소리를 넘어서서, 이 세상 그 누구도 피해가지 못하는 것으로 즉, 나 역시 거기에 해당 된다 라는 생각에 이르면 ‘딸까닥 소리’라는 표현이 우습기는 하지만 또 다른 여운의 긴 꼬리를 남겨줍니다.
“우두둑”소리가 ‘흘러간 노래’ 소리처럼 지난날의 한 장면으로만 돌려놓게 하는 “딸까닥” 소리는 언제부터 나는 것일까요? 60대? 70대? 저도 이제 50대 중반이니 내 무릎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어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우두둑 세대’입니까? ‘딸까닥 세대’입니까?
성경은 “모든 육체는 풀의 꽃과 같이 잠깐 중에 시들어 버린다.”고 말씀하고 있고 이 세상 그 누구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천년을 살 것처럼 분주히 움직이며 살아가지만 어느덧 하루의 해가 지면서 땅거미가 드리워지는 것처럼 서서히 소리 없이 그러나 ‘틀림없이’ 그 짙은 세월의 음영이 우리를 감싸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필히 맞이하여야 할 ‘딸까닥’ 소리라면 ‘후회 없는 딸까닥 소리’이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늙는 것’을 싫어하고 피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어느 날 갑자기 들려오는 내 몸의 ‘딸까닥’소리가 그 모든 것이 부질없었음을 말하여 줄 것입니다.
늙어가면서 더욱 그 마음에 기쁨이 더해지는 삶은 없는 걸까요?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삶’입니다.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우리를 기다리는 ‘본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곳은 ‘아프거나 늙거나 곡(哭)하는 것’이 없는 곳이라고 예수님이 보장을 하셨습니다. 물론 ‘딸까닥’하는 소리도 없겠지요. 우리 모두가 거기서 새롭게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09-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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